검도한지 4년차가 되간다.
2005년부터 검도를 시작했으니 올해로 벌써 햇수로만 4년째다.

워낙 운동신경이 없어서 별로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2단이고, 대련시 동작은 굼뜨고 느리며 칼이 타점에 맞지 않고 뱅뱅 돌아가는 것이 안고쳐진다. ㅠㅠ

운동신경은 없으나 끈기와 지구력으로 버티고 있다. 열심히 해서 3단도 따고, 4단도 따서 사범도 해야지. 그러고도 나이먹어서도

주구장창 계속해야지(-ㅂ-).


내 꿈 중 하나인 검도 고단자의 길은 원대하기만 하다. -.-....


나이 오십 쯤엔 그래도 어느 경지에 이르기를 바랄 뿐.
by 효모 | 2008/04/18 11:40 | 어설픈 운동 | 트랙백 | 덧글(0)
광명시에서 열린 검도대회에서


우리 도장은 남자 장년부, 중년부, 초등 저학년부, 여자부 . 요렇게 팀을 구성해서 나갔는데 좋은 대진운에도 불구하고 입상을 못해 아쉬웠다.

여자부는 3인조 경기. 선봉, 중견, 주장 이렇게 셋이 나간다. 주장인 나는 앞에서 선봉과 중견이 실점하는 걸 지켜보며- 상대방이 우릴 완전 물로 보겠군-이라고 생각하면서 상대 주장의 손목을 두대 때려주고 나왔다.


사진은 남자 장년부 시합모습. 여자부도 좀 찍어주지..흥.
by 효모 | 2008/04/17 09:42 | 어설픈 운동 | 트랙백 | 덧글(0)
바다의 성당- 힘 없는 선량함에 대하여
바다의 성당 1바다의 성당 1 - 6점
일데폰소 팔꼬네스 지음, 정창 옮김/대교베텔스만주식회사(베텔스만)



 성격이 무난한 주인공이 민중을 위한 삶을 살아간다는 내용이라면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라 예상했다. 실제로 이야기의 결말은 그런 식이었다.
 아버지 베르나뜨가 아들 아르나우에게 '세상에는 배고픈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을 때 읽는 나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빨리 감동할 것을 종용하면서 힘주어 글을 써 내려 갔을지도 모른다.
 이 책이 민중을 위한 책임에는 틀림 없다. 이야기의 끝까지 민중의 승리로 막을 내리며 민중이 원하던 삶의 권리를 주인공 아르나우를 통해 되찾게 하는 줄거리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아르나우를 운명의 승리로 이끄는 것은 타인에게 선의를 베풀줄 아는 너그러운 성품과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성실함이다. 세계를 운영해온 귀족 계층이 가지고 있는 영악함과 반대되는 민중만이 지닐 수 있는 미덕이다. 실제로 삶의 어떤 가치를 추구함에 있어 무지하다 못해 순수한 용기가 거대한 업적을 이룩하는 경우가 있다. 과연 아르나우의 선의를 받아줄 만한 그의 주변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르나우는 행복을 쟁취할 수 있었을까.

 소설 속이 아닌 정치판이나 현실에서는 순수한 용기나 선의가 아무렇지도 않게 배신당하고 사라져 버리는 모습을 너무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민중의 미덕을 지닌 사람이 살아남아 성공한다는 것은 결국 현실을 견뎌내는 것 조차 버거운 민중의 판타지다.
순수한 마음과 사람에 대한 애정을 지닌 자가 많은 이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누리게 되는 것. 그가 곤궁에 처할 때마다 그의 착한 마음에 감복한 조력자의 손길이 그를 보호하는 것. 그렇게 살아남는 과정.

 결국은 소설이기에 서술 가능한 염원이고 허구일 수 밖에 없다. 책을 덮고 리모컨을 들어 뉴스를 키면 우리가 책 속에서 읽은 이야기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래서 아르나우가 이룩한 삶은 허구에 가까운 진실이 되며, 베르나뜨의 죽기 전 외침은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다. 나약한 선량함은 배고픈 자유를 위해 무엇이 되어줄 수 있을까.
http://qkstkak.egloos.com2008-01-23T01:11:170.3610
by 효모 | 2008/01/23 10:11 | 평범한 독서 | 트랙백 | 덧글(0)
[침이 고인다]-기억하고 싶은 것
침이 고인다침이 고인다 - 10점
김애란 지음/문학과지성사

 나는 책을 읽으며 감각적으로 흥미가 동하는 행위에 관심이 없다. 항상 가방 안에는 책이 있지만 재기 발랄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는 내용의 책이 대부분이다. 삶 자체가 굴곡없이 평범하게 흘러가는 것이란 인식에 바탕한 까닭일까. 내게는 허구로 읽는 이야기조차 현실과 닮아야 한다는 강박관점이 있다. 
 얼마 전 김애란이란 작가의 인터뷰를 읽고 그녀의 소설을 찾았다. '침이 고인다'라는 제목과 아담한 책크기. 은근하게 읽는 이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누구나 다 겪는 일들, 심지어는 너무나 뻔한 일들의 나열까지-그녀의 소설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굳이 내가 아는 일들을 소설로 다시 읽어내는 게 무슨 의미인가 하겠지만. 실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들이 -그 중요성의 고하를 막론하고- 소설로 쓰여진 건 결국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삶 속에서 잃어버린 것,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에 대해 고민한다. '도도한 생활'의 그녀는 어린시절 함께하던 피아노를 잊지 못하고, '침이 고인다'의 후배는 어린 자신을 도서관에 버린 어머니를 그리워 한다. 과거의 슬픈 기억은 현재로까지 이어져 반복된다. 과거와 현실 속에서 각인된 상실은 결국 미래에서까지 그것이 예정되어 있기에 절망적이다. 삶을 관통하는 변칙적인 모습들 속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삶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잃어가는 과정이다.

 아마 그녀의 맛깔스러운 문장 속에 담겨진 이야기들의 의미는 그런 것일게다. 소설 속 이야기는 우리가 뻔하게 살아가는 모습들의 나열일 뿐이다. 결국엔 그 익숙한 풍경들조차 우리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아무리 시시한 것일지라도 결국엔 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그 속에서 상처입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소설은 쓰여진다. 시간 속에서 이루어 지는 수많은 상실들은 '기억'이라는 행위를 통해 보듬어 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삶의 아픔을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냉소적으로 기억해 내는 그녀의 소설이 좋다.
http://qkstkak.egloos.com2007-12-24T03:59:470.31010
by 효모 | 2007/12/24 12:59 | 평범한 독서 | 트랙백 | 덧글(0)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 신을 가두기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 10점
이사카 고타로 지음, 인단비 옮김/황매(푸른바람)

 종종 젊음이 버거운 순간이 있다.

 근래의 나는 종종 "빨리 할머니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늘어 놓는다. 결국 옆의 40대 아저씨에게 자기는 뭐냐는 핀잔을 듣게 되지만. 
 
 20대의 젊은 시절은 남들에게 떳떳하지 못한 허무함이란게 있다. 딱히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별것 아닌 일들이 대단하게 느껴진 적이 있다. 뭔가 일은 자꾸 틀어지고 허무해지고 허우적대도 벗어날 수 없는 수렁처럼 인생은 꼬이기만 한다. 그런 느낌은 마치 아무리 고치려고 색을 덧발라도 점점 더 기괴한 형상을 띄게되는 그림을 쳐다보는 것 같다.

 내가 남들이 납득할 만한 외적인 결함이 큰 사람도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고민이 남들과 달리 유난스러운 것도 없다. 모두가 공유하는, 공유한 적이 있는 '젊음'이란 단어는 계속되는 실수와 좌절의 연속이다.
 이 한시적이고 특이한 시간 속에 사는 젊은이들은 때로 예상치 못한 사건들과 마주친다. 각자 개인의 일상에서 시시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신문에서 보도된 사건들이 갑자기 등장인물의 삶으로 개입되기도 한다. 2년 전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는 교차되며 인물들의 내면에 있는 다양한 모습들을 쏟아낸다. 바람직한 모습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일그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책 속에서 주인공들이 공유하는 정서는 이 시기의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느끼기 힘든 혼란스러운 감정의 연속으로 보인다.

『들오리와 집오리의 코인로커』속 주인공들은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살아간다. 가능한한 여러 여자를 사귀는 것이 삶의 목표인 가와사키, 부탄에서 온 외국인 도르지, 도르지와 함께 사는 동거인 고토미, 2년 후 도르지가 사는 집 옆으로 이사오는 시나까지 그들은 청춘이라는 삶의 순간을 공유한다. 애완동물 살해범들과의 얽힘으로부터 시작된 진창의 고리는 도르지가 시나를 꼬드겨 서점을 습격하기로 모의할 때까지 끊어지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른다. 그들의 의도하지 않은 슬픔을 경험하면서 자신들의 감정을 각자의 방법으로 보상해 나가려 한다. 도르지는 고토미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직접 고토미를 위한 복수를 실행한다. 잘못하는 것은 알지만 병에 걸린 가와사키의 자살까지, 그들의 시간 속에 녹아있는 것은 스스로도 어쩌지 못할 고통과 어그러짐의 연속이다.
 소설 속에서 밥 딜런의 노래는 언제나 특별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도르지와 가와사키는 딜런의 목소리를 상냥한 신의 목소리라 단정한다. 신의 목소리는 착한 행동을 한 이들에겐 보상의 목소리지만 나쁜 행동을 한 이들에게는 단죄의 목소리다. 인생에 바람직한 모습과 대면하지 못하는 젊음에게, 신의 목소리는 구원이 아닌 질책의 목소리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와사키와 시나는 밥 딜런의 녹음 테입을 지하철역 코인로커에 넣고 잠궈 버린다. 마치 신의 눈치를 피해 마음놓고 삶의 방황 속을 걸어가겠다는 두 젊은이의 각오를 담은 장면처럼 비친다. 그들은 멋대로 상처받고 허우적대도 괜찮을 것이다. 자신들의 잘못을 꾸짖을 대상은 코인로커 속에서 나오지 못할 테니까.


http://qkstkak.egloos.com2007-12-15T05:40:440.31010
by 효모 | 2007/12/15 14:37 | 평범한 독서 | 트랙백 | 덧글(0)
색, 계
by Isad | 2007/11/15 17:40 | 어설픈 영화 | 트랙백 | 덧글(0)
고슴도치의 우아함- 작은 강함의 궤적
고슴도치의 우아함고슴도치의 우아함 - 10점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아르테

  어린 시절 광고 카피 중 인상적인 어구가 있던 것을 기억한다. 소리 없이 강하다-라는 문장에 어린 나는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강함이란 언제나 거대한 형체와 존재감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것이 아닌가. 거대한 몸집의 최홍만과 마이클 타이슨을 상기해보자. 우리는 그 사람들을 강하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 언제나 그들은 링 위에서, 싸움 속에서 승리를 얻고 환호 속에서 빛을 발한다. 사람이 동경하는 강함이란 결국 뚜렷한 형체를 지닌 것이고, 강한 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무엇이다.
 ‘강함’이란 가치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건 외적인 화려함이 충족될 때 가능해진다. 사회 속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큰 힘을 행사할 때 드러나는 강함을 사람들은 동경한다. 하지만 강함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할지 모르지만, 다른 종류의 강함은 분명히 삶 속에 존재한다. 알아채지 못하는 보물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는 것은 성실한 자기고집과 굳은 심지를 요하는 일이다. 특히 소리 없는 강함을 보물로 가진 이들에게는 숙명이다.

 이 책의 주인공 르네는 부자들의 아파트를 지키는 나이 많은 수위 아줌마다. 겉보기엔 돈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지만 그녀에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보물이 있다.  바로 그녀가 즐기는 수많은 문학적 지성에 대한 애정이다. 톨스토이를 좋아하고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좋아하며 수많은 학술 논문을 읽는 그녀. 르네는 자신의 본성을 초라한 외모 속에 감춘다. 수위실은 자신의 취향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자 그녀 자신만의 세계를 지킬 수 있는 왕국이다.

 

 르네의 정신세계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받기란 쉽지 않다.  타인의 공감을 구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지키는 일은 어렵다. 공감은 자아가 자신을 믿고 살아 나가도록 하는 중요한 가치인 까닭이다. 무모하리만치 성실하게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홀로 지켜 나간다. 고독한 싸움은 그녀를 알아 주는 오주와 팔로마와의 만남이 있기 전까지 계속된다. 

 오즈가 나타나 그녀의 숨겨진 매력을 알아주고, 팔로마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 안에 잠재된 상처를 끌어낼 수 있어 행복했던 르네. 간신히 잡은 행복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체 그녀는 사고로 세상과 결별한다.
 르네의 삶에서 힘겹게 지켜온 그녀의 세계, 섬세한 강함은 어이 없을 만큼 쉽게 사라진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르네는 그녀를 알아준 두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행복을 느꼈다. 오즈와 팔로마도 르네와의 교류를 통해 행복해 질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릿 속에서 흘러나와 친밀한 주변 사람에게까지 퍼지는 그녀의 보물은 그 속에서 찾아낸 작은 강함의 궤적을 그려낸다.


 그녀가 사랑했던 삶의 즐거움은 팔로마와 오즈에게 이어져 그들의 삶 속에 면면히 호흡하는 공기가 된다. 작은 강함을 지켜내는 길은 이토록 고집스러우면서도 상냥하게 타인과 공존한다. 

http://qkstkak.egloos.com2007-11-12T07:30:590.31010
by Isad | 2007/11/12 16:31 | 평범한 독서 | 트랙백(2) | 핑백(1) | 덧글(1)
<once>마법같은 순간

(이 영화 이후로 다다다다~ 허밍은 작업맨트가 될 지도 모른다.^^) 

 영화관이 아니라 콘서트장 같았다. 영화 속 남녀는 서로의 음악이 공명하는 순간 진심을 노래했다. 처음에는 그가 먼저 기타로 음을 가르쳐준다. 그녀는 들리는 가락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 피아노와 함께 노래한다. 조금씩 엇나가던 음정이 하나의 화음으로 모아지면서 진심어린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서로의 템포에 익숙해 지면서 조금식 서로의 음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결국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제목 '원스once' 가 주는 암시는 소통의 순간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와 그녀는 각자가 속한 삶의 공간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는 것. 나 또한 그 사람을 알아주는 것.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한 매개로써 음악은 서로의 존재를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우리의 삶은 인터넷을 통한 익명적인 만남과 현실 속에서 격식에 얽매인 형식적인 만남으로 빚어져있다. 마음이 아닌 머리를 통한 만남이 계속되는 것이다. 인터넷 계시판을 통해 만난 사람은 그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얼굴을 대면하는 만남이라해도 조직이나 단체 속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속내를 비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같은 물리적 공간을 함께 하면서 이해관계에 얽혀서 만나는 게 아니다. 음악 속에 담긴 가식없는 감정들이 녹여진 마법같은 순간. 두 사람은 함께 온전히 그것을 공유한다. 원스의 그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그들의 순간이 현실의 삶 속에서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by Isad | 2007/11/03 11:13 | 어설픈 영화 | 트랙백 | 덧글(0)
<유시진-온: 낙원 너머 존재하는 것>
온 1온 1 - 8점
유시진 지음/시공코믹스

1. 판타지임에도 익숙하지 않은


유시진의 판타지는 어딘가 이상하다. ‘판타지’라는 장르의 이야기라면 기존에 우리가 익히 알아온 세계관을 답습한 흔적이 보여야 할 것이다. 그녀의 판타지에는 엘프, 드워프 같은 익숙한 종족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하물며 등장인물은 판타지 소설의 전형과 같은 영웅형 캐릭터인가. 그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시진의 판타지는 현실 그대로의 차용이며 일상의 풍경 속에서 묘하게 비틀어진 생경함과 맞닿아 있다. 그녀에게 판타지 작품을 만드는 것은 장르 자체에 대한 지향이 아니다. 작가의 마음대로 이야기를 끌고나갈 자유를 확보하는 장치다. 때문에 옆집에 사는 이웃이 인간이 아니어도 문제가 없고, 팬이 된 동화작가가 다른 세계의 마법사여도 상관없다. 그것들이 모두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위한 편의를 도모할 수 있다면, 유시진의 세계에서는 용인된다. 그녀가 굳이 판타지의 형식을 사용하고자 하는 이유는 등장인물 개개인이 말하고 싶은 속내를 더 쉽게 표현해내기 위함이다. 현실의 규격에서 벗어나 판타지의 모호함을 차용함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운 심리적 독백이 가능하다. 우리는 그녀의 작품을 볼 때마다 흡사 주인공 뇌 속의 목소리를 육성으로 듣는듯한 착각에 빠진다.

소설가 하제경은 서울 근교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소설가다. 서울에 있는 출판사에 찾아간 그는 우연히 동화작가 이사현을 알게된다. 이사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그의 그림책을 전부 사보게 된 하제경. 이사현이 자신의 집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사현을 찾아간다. 그들의 만남은 단순히 소설가와 동화작가의 만남으로 끝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이 세계에 존재하기 전 다른 차원의 세상인 ‘온’에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사현은 사미르라는 이름의 마법사로, 하제경은 나단이란 이름의 젊은이었다. 『온』은 정신적 가치를 상징하는 에온과 물질적 가치를 상징하는 데온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진 세계다. 에온과 데온을 관장하는 수장인 휴스에온과 휴스데온이 존재하며, 휴스에온을 계승하는 사람들과 휴스데온을 계승하는 사람들의 위계질서가 잡혀있다. 사미르는 휴스에온 제 1계승자이며 나단은 휴스데온의 제5계승자다. 그들은 ‘에리쉬 오넨’- 에온계 계승자와 데온계 계승자가 상호학습을 통해 서로에게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제도-을 통해 3년간 함께한다. 제 5계승자라는 허울뿐인 위치의 나단과 달리 사미르는 명실상부한 제 1계승자로서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나단이 사미르와 함께 하면서 겪는 좌절은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궁극의 낙원을 마음 속에 품은 자를 모고는, 그 사람의 빛이 자신을 감싸주기를 바라게된 것이다.


2. 낙원의 빛을 본 자의 마음


나단은 말한다. “나의 아버지가 되어줘. 내 친구가 되어줘. 내가 되어줘.” 그의 바람은 사미르를 통해 얻어질 수 없다.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여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보게 되면 혹자는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그를 숭배할 것인가, 아니면 그를 파괴할 것인가. 낙원의 정점에 위치한 인간을 본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버거운 감정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어디로 향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욕망을 지니며 산다. 특별히 잘하는 게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뭔가 대단한 일들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보통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역량부족인 자신을 느끼며 절망한다. 삶 속에서의 절망은 습관이 되고 일상이 되며 결국에는 무감각해진다. 이상은 없는 것이라며 포기하고 사는 게 쉽다는 것을 터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욕구에 걸맞는 타인의 존재를 찾는다. 나를 채워줄 누군가,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를 말이다.

마음의 허기를 굳이 느끼지 않아도 본인 스스로가 충만감으로 가득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가 추구하는 삶의 지향점이 명확할수록, 그에 대한 몰입이 순수하고 온전할수록, 그 모습을 쳐다보는 불완전한 마음의 타자는 초조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바라던 완전함이 바로 눈앞에 있지만 이상향은 그것을 바라보고 흠모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이상을 추구하도록 허락된 자만의 빛이요, 낙원일 뿐이다. 개인의 낙원을 향한 빛에는 온기가 없다. 애초부터 지극히 자신의 세계에 몰입하기 때문이다. 악의는 없지만 그렇다고 타인을 향한 적극적인 선의도 없다. 빛의 수혜를 바라는 사람에게 그것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는 빛을 보는 자는 그 빛을 직접 부수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나단은 사미르를 통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낙원의 입구를 발견한다. 낙원을 향한 입구. 그러나 닫혀있는 문. 오로지 사미르에게 열려진 낙원을 본 순간 나단은 본능적으로 낙원을 파괴하는 자가 자신이 될 거라는 것을 느낀다.


3. 『빛』의 본질


사미르는 모든 능력을 잃고 그의 황금안을 빼앗긴 체 온에서 추방된다. 그에게 능력이란 삶의 모든 가치를 쏟아부은 것이었다. 자신이 추구하던 지위와 능력을 모두 잃은 순간 낙원의 소유자는 빈껍데기가 되버릴 수 밖에 없었다. 추구하던 이상에 정신을 집중한 나머지 그것 외에는 존재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는 사미르에게 추방과 몰락은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였다. 사미르는 자문하기 시작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완전한 몰입이 빚어낸 낙원 속에서 놓친 것은 무엇인가.

온에서 나온 사미르는 이사현이라는 이름으로 삶을 살아간다. 사미르에서 이사현으로의 변화는 그에게 해답을 가르쳐준다. 사미르의 낙원이 간과하고 있던 가치는 바로 ‘타인의 마음’이다. 옆에 젤과 나단이 있었지만 그들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자신만 존재해도 충분한 삶이었던 것이다. 사미르는 바로 곁에 있던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다.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곁에서 두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고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를.

사미르가 성직자로서 맡았던 소임 중 치유의 소임이 있었다. 신의 가호를 입어 병에 걸리지 않는 사미르에게 나단은 “아파본 적이 없으면서 어떻게 병자를 치료할 수 있는가”라며 묻는다. 후에 사미르가 말한대로 치료술의 기본은 연민이다. 연민은 자신의 고통에 빗대어 남에게도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다. 사미르가 지니고 있던 마음 속 낙원의 빛은 세상의 풍파로부터 그를 지켜주는 온실과 같은 것이었다. 자신만의 공간 속에 있었던 사미르가 타인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게 당연하다. 그의 치료는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할 순 있었어도 마음에 난 상처를 치료할 수는 없었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사미르가 자신의 치유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저 그가 지닌 여러 능력 중 하나를 타인에게 베푸는 방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가 항상 사람들에게 대하는 친절도 그저 적당히 베푸는 형식적인 호의였을 뿐이다.


4. 잔해 속에서 새로 생겨난 것


사미르로써가 아닌 이사현으로써의 삶은 그에게 타인을 돌보려는 마음을 지니게 만든다. 젤의 심정을 묻기 시작하고 하제경(나단)의 소설을 읽으며 그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행위가 그를 파멸로 몰아갔음이 밝혀지지만 이사현은 그 둘에게 자신 또한 용서를 구한다. 그들의 마음 속 슬픔을 알아채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낙원은 부서졌지만 잔해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낙원의 소유주는 본인이 살고 있는 삶 속에 안착할 수 있었다. 아무런 고통없이, 그저 순수한 몰입만이 존재하는 나약한 낙원보다는 비루하지만 서투른 삶의 온기를 공유할 수 있는 현실이 가치있는 것이다. 자신의 내부에너지가 자신의 안으로 수렴되지 않고 타인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http://qkstkak.egloos.com2007-10-31T08:55:310.3810
by Isad | 2007/10/31 17:53 | 평범한 독서 | 트랙백 | 덧글(0)
꿈에 대해 말하려니 겁난다
20대가 사라졌다(허지웅님의 블로그에서 트랙백)

 허지웅님의 글을 보고 스무살이라는 나이에 걸맞는 사상이 무엇인지 가늠하기가 힘들어졌다. 
  
 20대의 젊음을 가진 우리를 어른들은 부러워한다. 너희는 젊다느니, 그 시절이 인생의 황금기라느니 식의 조언을 하며 뿌듯해들 하신다. 어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런생각이 든다. 우리가 지금 매우 괜찮은 삶의 순간을 살고 있나보다. 근데 우리는 왜 삶이 혼란스럽고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어쩌면 지금의 방황이 우리의 태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어른들의 조언 속에서 젊음의 혼란과 방황을 긍정하는 말을 듣는 것은 어렵다. 그들의 조언은 젊음의 고통을 어린 사람들의 게으름의 결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젊은이들이 가질 수 있는 꿈과 이상. 비록 실현될 수는 없어도 젊음으로 인해 가질 수 있는 꿈의 무게라는 게 있다.  생계로 인한 재정적 문제가 매우 중요한 20대의 테마이긴 하다. 20대의 문제는 경제적인 수단을 절실히 요구함과 동시에 추상화된 이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욕구가 다른 세대보다 앞선다는 것에 있다. 여기서 다른 세대라 함은 현재 사회 전반의 주류를 구성하고 있는 기성세대를 가리킨다. 기성세대가 세상을 구축하는 방식은 그들 이전부터 오랫동안 존재해온 거대한 이 사회를 이끌어진 사회의 유지를 용이하게 하는 방법이다.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등 나이드신 분들이 젊은이에게 말하는 바람직한 삶의 자세. 그 바람직한 자세를 통해 이제껏 사회는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요소를 제거해왔고 유순한 사회 구성원들을 재생산해왔다. 적어도 나이드신 분들의 말씀을 따른다면,  사회 속에 큰 방황없이 안착할 수 있을 것이다. 되려 사회의 질서에 공헌한 댓가로 적절한 명성과 부를 누리게 된다. 

 실제로 어른들이 말하는 가치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른들이 말하는 가치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리적으로 반발심이 생긴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올바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기성세대들은 현실을 사는 법을 이야기한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적절한 방식을 젊은이들에게 말해준다. 어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대부분의 현실운용법이란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며 세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적절한 선택이다. 절대적 가치에 비교하여 봤을 때 올바른 방식은 아니다. 적절함이라는 단어에는 승자와 패자라는 개념이 내재되어 있고 적절함에 우위를 든다는 것은 승자에게 가치를 두는 방식을 긍정하는 것이다. 


  어른들이 말하는 그런 식으로 현실이 굴러간다는 것은 안다. 근데 어른들이 말하는 현실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일까. 다른 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은 없을까. 조금 궁금하다. 20대이고 아직 뭔가를 이루고 싶은 이상을 지낸 자신이, 자신을 마모시키지 않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믿음을 가지고 싶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한발한발 다가가고 싶다. 내 꿈은 그런 의지와 연결되어 있다. 앞으로 나의 꿈을 위해 정진할 것이다. 어쩌지 못하는 경제적인 불황이 나를 덥쳐서 현실을 등질 수 없는 당위가 서지 않는 이상은. 덕분에 어디가서 나 이런거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 못한다.

특히 나에게 취업 조언을 해주시는 어른들에게.
by Isad | 2007/10/30 17:47 | 엄연한 현실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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